민회운동부터 4·19혁명, 촛불집회까지... 새 시대 연 광화문광장
민회운동부터 4·19혁명, 촛불집회까지... 새 시대 연 광화문광장
Blog Article
편집자주
'안창모의 논쟁적 공간'은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부 교수가 한국 사회의 논쟁적인 공간과 건축 이슈를 풀어내는 기획입니다. 4주에 한 번 연재합니다.
지난달 1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시 관계자들이 세종대왕 동상을 세척하고 있다. 연합뉴스
조기 대선의 막이 올랐다. 대선 정국에서 가장 핫한 장소가 어딜까? 제1당 후보는 '광화문광장', 제2당 후보는 '서문시장'을 찾았으며, 국가산업공단과 노동운동 현장을 찾은 후보도 있었다. 각 후보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시대적 과제와 가치 그리고 정체성에 맞는 장소를 찾아 선거 운동을 위례 자이
시작했을 것이다. 평소에는 무심코 지나치지만 국가적 차원의 큰(?) 일이 있을 때면, 예외 없이 주목 받는 장소가 있다. '광화문'이다. 정확히는 '광화문광장'이다. '광화문' 뒤에 '광장'이라는 단어가 붙느냐 마느냐에 따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광화문광장 시초는 조선 육조거리
1300만원대출
광화문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의정부(오른편)와 삼군부(왼편) 전경. 안창모 제공
'광화문'에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보는 것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에서 남쪽으로 쭉 뻗은 물리적인 세종로를 보는 것이고, '광화문광장'에서 대한민국의 오늘을 기업은행 햇살론
보는 것은 광장의 한복판에서 우리가 만든 대한민국의 내일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전자가 마치 왕 또는 통치자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을 본다면, 후자는 광장의 주인인 시민 입장에서 자신의 나라를 보는 것이다. 이 두 시선이 같을 수 없다.
광화문광장을 처음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오늘의 광화문광장을 있게 한 시작점에는 조선을 건국한 주체인 태생산관리공정
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는 서울 천도를 결정했고, 정도전은 신흥사대부들이 지향하는 가치를 담아 한양도성을 만들고, 상징인 경복궁과 함께 육조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서울인 한성은 한양도성과 도성을 둘러싼 성저십리로 구성되며, 도성의 공간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경복궁 앞(남측)에는 관청이 폭 50여m에 달하는 대로를lh 대학생 전세임대주택
사이에 두고 배치되었는데, 동반서반(東班西班)의 원칙에 따라 동쪽에는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예조가, 서쪽에는 삼군부, 사헌부, 병조, 형조, 공조가 위치했다.
조선은 왕조국가의 틀을 갖고 있었지만, 왕이 무력에 기초한 절대 권력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재상들에 의해 견제받는 체제를 구축한 나라다. 그래서 두 차례나 폭군을 쫓아연체중대출
낼 수 있었고 그 전통은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조선의 모습은 한양도성의 상징적 공간인 경복궁과 세종로의 배치구조에 잘 담겨 있다. 왕의 공간인 경복궁과 대등하게 재상과 백성의 공간인 육조거리가 조성되었고, 육조거리는 문반(文班) 관료를 대표하는 의정부와 무반(武班) 관료를 대표하는 삼군부가 마주 보도록 조성되었다. 이는 문(文)과 무(武)가 견제은행대학
와 균형을 통해 나라를 강건하게 유지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현대적 광화문광장 시작은 4·19혁명
서울 종로 청와대에서 바라본 세종로의 풍경. 안창모 제공
우리의 역사 속에 기업은행환승론
'광장'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대신 저잣거리의 (놀이)마당이 있었고, 저잣거리의 마당은 각종 연희와 판소리 등이 열려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는 곳이었으니, 오늘날 광장과 유사한 소통과 해소의 장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광장은 없었지만, 광장의 물리적 뿌리를 우리의 역사에서 찾는다면, 저잣거리의 놀이마당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자연스적금계산
럽게 부르고 있는 광화문광장은 언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우리 민주주의의 뿌리는 1898년 독립협회의 민회(民會)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주권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고종이 대한제국을 출범시켜 서양식 근대국가를 지향하는 것에 대응하여 인민이 중심이 된 민회운동인 만민공동회가 있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백성(百姓)을 대신하여 사용된 인민(人民대학성적
)은 오늘날 시민(市民) 또는 국민(國民)에 해당한다. 동학농민전쟁으로 상징되는 전통시대의 봉기가 저물고, 비폭력 정치적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통해 민의를 표출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 장소가 경운궁 일대, 육조거리, 종로 네거리였다.
독립협회는 민회를 개최하기 전에 전통적인 의사표명 방식인 상소문을 올렸고, 사람들이 몰리는 종로 네거리는 민회의 중심이었다. 관청이 집중된 육조거리 역시 민회의 중요 장소였다. 그리고 민회운동은 3·1운동, 이승만의 독재를 무너뜨린 1960년의 4·19혁명 그리고 군정을 종식시킨 1987년의 6·10민주항쟁과 2016년의 촛불혁명으로 이어졌으며, 그 중심에 광화문광장이 있다.
세종로의 1950년대 모습. 작가 미상
현대적 광화문광장의 시작은 4·19혁명이다. 4·19혁명의 배경에는 이승만 전 대통령의 독재와 부정선거가 있다. 그리고 우남(雩南)기념회관은 이승만 정부의 말년 모습이 어떠했는지 잘 보여준다. 이 전 대통령의 호를 딴 우남기념회관 건립은 서울시 차원에서 행해진 이승만 박사 송수탑 건립과 집집마다 국기를 게양하도록 했던 이 전 대통령 80회 탄신일의 연장선상에서 추진된 일이었다. 당시 서울시장이 추진한 우남기념회관 건립에서 대통령의 호인 우남이 사용되자 사회적 반발이 거셌고, 이 전 대통령이 우남을 이름에서 빼라고 했으나, 결국 우남회관으로 명명됐다. 우남회관을 고집했던 고재봉 전 서울시장은 대통령도 우남 명칭을 반대했지만, 건축가들이 "우남 아니면 설계비를 받겠으며, 우남이면 설계 보수를 안 받아도 좋다"고 하기에 결정했다며 건축가를 이유로 댔다.
결과적으로 4·19혁명으로 이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에서 쫓겨났고, 우남회관은 시민회관으로 바뀌었다. 당시 한글학자인 최현배 선생이 우남회관을 세종회관으로 바꿔 대왕의 위업과 성덕을 기념하자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 시민회관이 화재로 불탄 후 다시 지어지면서 세종문화회관으로 바뀌었다. 역대 가장 위대한 왕이라고 칭송받는 세종의 이름이 사용된 문화회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는 쉽지 않지만, 개명의 배경에는 냉전 체제의 완화와 남북 분단의 현실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세계탁구선수권대회가 있었고, 대회에 참가한 미국 선수단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면서 동서 냉전의 물꼬가 트였다. 이를 계기로 시작된 남북 대화가 7·4공동성명으로 결실을 맺었을 때, 시민회관이 화재로 소실됐다. 남북 대화를 계기로 남북 상호 방문이 가시화되자 정부는 설계 공모로 당선된 건축가 엄덕문에게 시민회관을 전통건축 형식으로 지어진 평양의 평양대극장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지을 것을 요구했다.
다행히 건축가의 제안으로 전통건축의 현대적 해석에 의한 오늘의 문화회관이 지어졌다. 문화회관의 개관 직전인 1978년 2월 8일 서울시는 서울시립문화회관을 서울시립세종문화회관으로 바꾸겠다고 발표했다. 화재 후 다시 짓는 계획이 발표될 당시에도 시민회관이었던 이름이 세종문화회관으로 바뀐 것은 예술원 박종화 회장의 의견에 따른 것이라고 했지만, 배경에는 남북 분단 상황에서 민족적 정통성을 계승하는 상징적 장치로 세종대왕이 필요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시민의 힘으로 새 시대 여는 현장
서울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세종문화회관과 세종대왕 동상. 안창모 제공
육조거리는 언제부터 세종로로 불렸을까? 그 배경에는 일제강점이 있다. 육조거리의 이름이 일제강점기에 광화문통(光化門通)으로 바뀌었는데, 해방 후 일본식 지명을 우리말로 바꾸는 과정에서 광화문통을 '세종로'로 바꿨다. 그런데 우리는 거리에 사람 이름을 사용하는 전통이 없다. 그럼에도 서울 거리에 을지로, 충무로 등 역사적 인물에서 비롯된 이름의 도로가 등장한 것은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후 왜색 지명을 바꾸면서 역사를 빛낸 인물이나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을 일본색 짙은 거리에 내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해 2009년에는 세종대왕 동상이 세종로 한복판에 설치되었다.
1946년 왜색을 지우기 위해 등장한 세종로가 세종문화회관을 낳고 급기야 세종대왕 동상까지 세워지면서, 시대를 앞선 정치 체제를 구축하며 그에 합당한 공간 구조를 만들었던 정도전의 구상이 세종대왕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4·19혁명과 6·10민주항쟁 그리고 촛불혁명으로 이어진 민회운동의 전통이 광화문광장이라는 이름과 함께 현장에 살아있다는 점이다.
4·19혁명 당시 광화문광장은 10만의 젊은 숨결이 총칼과 맞서 독재와 부패의 수레바퀴를 뒤엎었던 현장이라고 한 언론은 "짓밟힌 민주주의의 싹을 움켜 쥔 4월의 숨결이 한데 뭉쳐 민족의 맥박이 되어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있었다"고 했다. 4·19혁명 현장이 '자유와 평화의 로터리'가 되어 '부디 민주주의의 광장이 되어지라'는 간절한 바람이 오늘에 이어진 것일까? 우리는 오늘, 다시 광장에 모인 시민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현장을 보고 있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부 교수